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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03:07

히파티아(Υπατία)와 역사

고대 철학자 ‘히파티아’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서기 4~5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여성 히파티아는 일반인들에게는 썩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를 사랑하는 일군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밀교적 분위기를 풍기는 숭배의 대상이다.

수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히파티아를 고대 그리스 수학의 정수를 익힌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기억하고 있으며, 여성주의자들은 뛰어난 지성 때문에 남성들의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 첫 여성 순교자로 경배하고 있다. 또 한무리의 문학가들에게 히파티아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체’를 지닌 채 처참하게 살해당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름이 높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히파티아의 이미지를 종합하면, 그는 역사와 신화가 뒤엉킨 자리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의 존재다. 그렇지만 히파티아의 실체를 알려줄 사료가 많지 않아 그의 매혹적인 모습은 실상 풍문과 전설의 도움을 받아 구성된 것이라고 해야 맞다. 폴란드의 여성 역사학자 마리아 지엘스카가 쓴 <고대 그리스가 사랑한 여인 히파티아>는 이렇게 상상력이 부풀린 히파티아에게서 허구의 거품을 걷어내고 가능한 대로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모습을 추적한 책이다. 지엘스카는 먼저 근대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히파티아를 각색했는지 보여주고, 이어 각색 이전의 히파티아를, 관련 문헌을 꼼꼼히 살펴 재구성한다. 




△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왼쪽) 과 본디 모습에 가깝게 그린 히파티아 초상. 


지은이에 따르면, ‘히파티아 신화’의 출발점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반교권투쟁과 궤를 같이한다. 종교적 갈등 과정에서 빚어진 히파티아의 희생을 당시 가톨릭의 탄압을 받는 계몽주의자들의 모습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런 사정을 잘 보여주는 첫 저작이 아일랜드 사상가 존 톨런드의 역사에세이다. <히파티아 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결하고 가장 학식이 높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 그러나 흔히 성인이라는 부당한 칭호가 붙은 대주교 성 키릴루스의 자만심과 경쟁심, 잔임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진 여성의 역사>라는 길다란 책 제목은 톨런드가 생각한 ‘위대한 이교도’ 히파티아의 모습을 요약해 보여준다.

이렇게 형성된 히파티아 신화는 자가발전을 거듭해 “서구인의 상상 속에서 육체적 아름다움과 정신의 불멸성을 구현한 존재”로 히파티아의 상을 새겼다. 19세기 실증주의자들은 히파티아를 “종교에 대항하는 과학의 용감한 옹호자”로 찬양했고, 영국의 역사가 찰스 킹슬리는 그의 책에서 히파티아의 죽음과 함께 과학과 철학이 시들고 알렉산드리아의 지적인 풍토도 사라져갔다고 썼다. “히파티아 살해는 철학에 치명타를 가했다.” 심지어 20세기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조차도 “히파티아 사후 알렉산드리아는 더 이상 철학에 시달리지 않게 됐다”고 했다.

지엘스카는 고전 문헌을 샅샅이 뒤지고 이들을 서로 비교해 히파티아에 관한 연대기적 오해를 먼저 풀어보인다. 문학 속에선 폭도들이 몹시도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난자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지은이는 히파티아의 출생연도를 355년께로 올려잡음으로써, 그가 죽을 때(415년) 이미 예순이 다 된 노철학자였음을 밝혀낸다. 또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히파티아를 자유연애를 구가했던 아주 개방적인 여성으로 상상한 것과는 달리, 실제의 히파티아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특히, 육체의 관능성을 멀리했다는 점도 밝힌다. 그는 플라톤적 정신주의의 계보를 잇는 신플라톤 철학에 깊이 몰입한 사람이었다. 


△  <아테네학당> 부분도. 위쪽 가운데가 히파티아. 라파엘로의 히파티아는 이상화된 금발의 젊은 미인이다.

히파티아의 정신주의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젊은 제자가 히파티아를 흠모해 자신의 불타는 사랑을 고백했다. “히파티아는 여성 몸의 물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생리대를 그에게 보여주며 나무랐다. ‘젊은이여, 이것이 그대가 사랑하는 것의 본모습이라네. 그러나 자네는 (외모가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지.’”

히파티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교도’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 상당수는 기독교도였고, 히파티아 자신이 그리스 철학과 학문을 특별히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리스의 신앙까지 받아들인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파티아는 왜 기독교인들에게 살해됐을까 지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건 기독교 내부의 분파 싸움이 낳은 정치적 음모의 결과였다. 히파티아는 당시 강력한 교권주의자였던 대주교 키릴루스와 좀더 온건한 기독교도였던 알렉산드리아 행정관 오레스테스의 대결에서 오레스테스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키릴루스파는 히파티아를 ‘검은 마술’을 쓰는 마녀로 몰아 죽였다는 것이다.

히파티아의 죽음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이 종말을 고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히파티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철학은 더욱 꽃을 피웠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렇게 지엘스카의 연구는 문학적 허구를 걷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파티아의 매력까지 떨어낸 것 같지는 않다. 역사 속에 실재한 히파티아가 철학, 수학, 천문학에서 당대 어떤 학자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고 수많은 인재들을 그의 품에 받아들여 가르쳤으며 “비범할 정도로 강한 성격과 불굴의 윤리적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엉성하고 조악한 번역이 이 특별한 여성을 알아가는 길에 번번이 장애물을 세워놓는 것은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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